Nothing OR Everything
Art de Vivre!
예술과 일상의 경계에서
남프랑스에 머문 예술가는 뜻밖의 풍경과 조우하며 영감을 얻었다.
그들의 시선을 좇으며 일상을 빛낸 삶의 예술을 발견한다.
Published by Lonely Plant Magazine 2018
Aix-en-Provence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늘쩡늘쩡한 노인의 걸음처럼 엑상프로방스는 시류에 떠 밀리지 않고 서서히 변화해왔다.“이곳 인구 절반이 은퇴한 노인입니다.” 구시가 투어를 맡은 엑상프 로방스 관광안내소의 담당자가 의연하게 말한다. 나머지 절반은 ‘젊은’ 학생이 차지한다. 유수의 대학교가 모여 있는 엑상프로방스는 ‘지성의 도시’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노부부가 노천 레스토랑에서 우아한 식사를 즐기는 동안 얼굴에 온갖 피어싱을 한 대학생은 노점에서 파는 2유로짜리 크레페로 점심을 때운다. 무얼 먹든 세대를 초월한 이들은 하나같이 한낮에 들이치는 노란 햇살에 삶의 경이를 표하는 듯 보인다. 일찍이 인생에 필요한 행복의 질량을 깨달은 것처럼.
폴 세잔(Paul Cézanne)이 엑상프로방스에서 여 생을 보낸 시기는 늙어서도, 젊어서도 아니다. 엑상프 로방스에서 나고 자랐고, 영혼의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지독한 우울증을 앓던 그는 파리 주류 미술계에서 밀려난 예술적 자존감을 고향에서 회복했다. 절친했던 에밀 졸라(Emile Zola)와 매일 밤 카페에 앉아 예술을 논하고 도시 곳곳을 누비며 새로운 화폭을 개척해나갔다. 엑상프로방스의 모든 풍경은 세잔의 캔버스에 담겨 작품이 됐다. 생트 빅투아르산 (La Montagne Sainte-Victoire)은 그의 시선이 머문 대표 장소다. 그는 말년에 매일 언덕에 올라 사이프러스 나무 틈에 걸린 바위산을 바라보며 수 십 점의 작품에 담았다. 전망 포인트로 알려진 화가의 테라스(Terrain des Peintres)에는 이곳을 거쳐간 수많은 화가를 알려 주는 팻말이 박혀 있다. 세잔의 시선을 따라온 모든 예술가가 이 목가적 풍경을 찬미했으리라.
엑상프로방스에서 자연 풍경이 먼저인지 예술 속 그림이 먼저인지를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 도심 곳곳 에 남아 있는 세잔의 흔적을 보라. 위엄 있는 동상, 돌 바닥에 새겨진 이니셜 ‘C’, 삶의 무대가 된 생가와 손수 꾸민 아틀리에까지. 여행자는 자연스럽게 세기의 화가가 남긴 작품을 따라 여행하며, 풍경과 예술의 경계를 맴돈다. 도심에서 북쪽으로 떨어진 세잔 아틀리(Atelier de Cézanne)는 자연의 인자함을 자각하고 작품에 몰두하던 세잔의 흔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 그는 사물과 풍경에 온 감정을 이입해 붓을 움직였고, 후대 미술사를 뒤흔든 걸 작이 탄생했다. “이 작업실은 미술관이 아닙니다. 세잔 이외의 다 른 것을 찾으러 오지 마세요.” 세잔 아틀리에의 안내 문에 적힌 문구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이 도시를 일군 건 대학생과 노인이 아닌, 고뇌에 가득 차던 예술가가 아니었을까? 세잔의 아틀리에를 빠져나오니, 그제야 이방인을 감싸주는 따뜻한 볕이 천천히 몸을 녹이기 시작한다.
MARSEILLE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자유
수십 척의 배가 정박한 마르세유 구 항구(Vieux Port) 에 도착하자 막 상경한 사람처럼 시선이 바쁘게 돌아 간다. 프랑스에서 두 번째로 크고 유구한 역사를 지닌 도시이자 지중해 연안 최대 항구. 그리고 낯선 여행자 에겐 위험한 도시. 엑상프로방스가 남프랑스의 전형 적 전원을 대표한다면, 마르세유는 자유로운 영혼이 들끓는 관광 도시의 면모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약 2,600년의 역사를 이어온 마르세유의 여러 단면은 각국에서 넘어온 이민자 만큼이나 다채롭다. 기원전 600년경 고대 그리스 선원이 이 땅에 정착한 이후, 수많은 이방인이 항구에 밀려 들어왔다. 자치 국가로서 힘이 없을 때는 약탈과 식민지 건설의 희생자였고, 도시가 비약적 부흥을 이뤘을 때는 자본의 냄새로 그들을 이끌었다. 지중해 항해 도중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예 눌러앉은 이도 적지 않다. 덕분에 마르세유에는 인근 유럽 도시뿐 아니라 아프리카, 터키, 아시아 문물과 이슬람 문화가 자연스럽게 뒤섞였다. 도시의 모태인 항구는 문화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석회암 언덕에 우뚝 솟은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성당(Basilique Notre–Dame de la Garde)의 황금빛 성모마리아는 항구를 드나드는 뱃사람을 오랫동안 지켜왔다. 여행자의 나침반처럼 어디서든 눈에 띄는 종탑의 금동상은 이 도시의 수호신이자 어둠을 밝히는 등대다. 19세기 로만 비잔틴 양식으로 지은 성당은 중 세 종교예술의 정점을 찍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행 자사이에선 도심을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는 공짜 전망대로 더 유명하지만. “저 멀리 기이한 주택 단지는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의 작품이에요. 저기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선박 회사 빌딩도 보이나요?” 마르세유 관광안내소 담당자 시릴 사부아(Cyrille Saboya)가 손가락으로 바다 너머 풍경을 열심히 가리킨다. 마르세유 는 2013년 유럽 문화의 도시로 선정되면서 백팔십도 탈바꿈했다. 뱃사람이 들끓던 항구 이미지는 이제 빈티지 포스터에만 남아 있을 뿐, 새롭게 이식한 현대 건축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한다.
현지인이 체감하는 도시의 급진적 변화도 2013년 전후로 나뉜다. 정부가 대대적인 재개발을 시작하면서 내세운 아이콘은 유럽 지중해 문명 박물관 뮤셈(MuCEM)이다. 대형 그물망이 건물을 뒤덮은 듯 보이는 건물은 세계적 건축가 뤼디 리키오티(Rudy Ricciotti)의 작품. 그는 현대 건축물이 마르세유 항구의 주변 경관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방법에 대해 오래 골몰했을 것이다. 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박물관이 해풍에 부식될 가능성과 중세 시대부터 항구를 지켜온 생장 요새(Fort St-Jean)와 연결점도 감안해야 했으니까. 그는 초강력 콘크리트를 촘촘하게 꼬아 독특한 파사드를 완성했고, 요새까지 이어지는 구름다리를 놓았다. 건축가의 기발한 발상으로 탄생한 뮤셈은 사방으로 기이한 장면을 연출한다. 박물관 내부에는 외벽과 맞닿은 복도가 있는데,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지중해의 바람과 햇살이 쉼 없이 드나든다. 빛의 움직임에 따라 넘실대는 그림자는 한 편의 몽환적인 작품 같다. “뮤셈은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자유와 조화 그리고 개방적인 자연요.” 사부아는 박물관 옥상 테라스에 누워 망중한을 즐기는 현지인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한다.
마르세유에 입성한 예술가는 도시 구석구석에서 예술적 영감을 받곤 한다. 관람객을 가득 싣고 떠나는 유람선의 행선지는 이프성(Château d'If)이다. 알렉 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소설 몽테 크리스 토 백작(The Count of Monte Cristo)에 등장한 감옥 말이다. 그는 외로운 바위에 견고하게 세운 성을 배경으로 처참하고 절망스러운 감옥을 표현했다. 중세 시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정치범을 수용했던 감옥은 오늘날 관광객이 끊임없이 드나들지만 황량한 분위기를 완전히 지우지는 못한다. 이집트 출신의 유세프(Youssef)가 예술가의 공방이 모여 있는 르 파니에 지구(Le quartier du Panier)에 터를 잡은 이유는 뒤마처럼 걸작을 탄생시키기 위해 서가 아니다. 그는 오래된 집을 개조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야외 부엌을 작업실 삼아 매일 그림을 그 린다. 자신의 작품이 지중해의 빛을 쬐도록 마당 여기저기에 걸어두면서. “파니에 언덕은 마르세유의 몽마르트예요. 골목마다 저 같은 아마추어 예술가가 숨어 있죠.” 그가 테이블에 펼쳐둔 그림을 하나씩 설명하며 말한다. 마르세유 전통 마을, 구 항구에서 잡아 올린 생선 등 강렬한 색감이 돋보이는 유세프의 그림은 10분만에 끝냈다고 믿기 힘들 만큼 완성도가 높다.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그저 떠오르는 것을 그려요. 이곳에선 모두가 예술가니까요.” 그가 웃으며 말한다. 평화로운 아틀리에를 빠져나오자 프랑스 인기 드라마에 등장한 ‘범죄의 바’가 불현듯 나타난다. 마르세유의 이면은 이처럼 의외성으로 연결되는 듯하다.
NICE
예상이 무너질 때 보이는 것
“날씨에 대해서는 매우 유감입니다.” 니스 관광안내 소에서 나온 안(Anne)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다.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는1년 내내 일정한 일조량을 자랑하는 도시에 등장한 최고의 불청객이다. 코발트빛 해변, 싱그러운 야자수, 풍요로운 휴양객이 넘실대는 니스의 ‘평범한 일상’을 깨뜨리는 건 오직 날씨 뿐이니까.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1917년 니스에 도착했을 때도 오늘처럼 비가왔다.다음날도그리고또다음날도.창을통해 들이치는온화한볕을처음맞이하던날,그는최고 의행복을느꼈고여생을이도시에머물겠노라다짐 했다. 이미 파리에서 예술적 성취를 모두 이룬 그에 게 지중해의 햇살은 뜻밖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프 랑스 출신 작가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소설 속 서 술을 빌리자면 이렇다. “마티스의 창은 니스를 향해 열려있다.그경이롭게열린창너머에는안경너머 마티스의 눈동자처럼 파란 하늘이 있다. 거울과 거 울의 대화가 펼쳐진다. 니스는 화가를 바라보고 화가 의 눈에 투영된다.” 눈부신 날씨는 실제로 마티스의 화풍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경쾌하고 밝은 색조로 돌 아선 그는 니스에서 <빨간 배경의 누드(Nu sur fond rouge)>(1922) 같은 걸작을 수없이 남겼다.
고대 로마 시대 유물이 남아 있는 시미에(Cimiez) 지구에는 마티스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그의 묘지가 자리한 시미에 노트르담 수도원(Monastère Notre– Dame de Cimiez)의 정원. 바로 옆에선 마티스의 일생을 담은 미술관과생전에 머물던 저택의 작업실이 그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 올리브 나무로 둘러싸인 정원에 폭 안긴 마티스 미술관(Musée Matisse)은 그림처럼 강렬한 색채를 내뿜는다. 1963년 17세기 제노바 풍 별장을 개조해 문을 열었는데, 마티스의 유언에 따라 시에 기증한 작품과 유족이 남긴 수백 점의 작품을 방대하게 전시하고 있다.
니스의 찬란한 날씨에 반한 건 마티스와 샤갈 같은 예술가 뿐이었을까. 18세기 영국 귀족은 일찍이 니스로 건너와 은밀한 휴양을 즐겼다. 쪽빛 바다를 끼고 조성된 4킬로미터의 해안로는 ‘영국인의 산책로’를 뜻하는 프롬나드 데 장글레(Promenade des Anglais)로 불린다. 리비에라(Riviera)라고 지칭하는 지중해 연안 여러 도시 중. 최고의 휴양지로는 언제나 니스가 꼽혔다. “우리는 세계 최고의 수영장을 갖추고 있습니 다.” 니스의 관광 명소를 돌아다니는 미니 열차가 해변을 지나치자 니스 관광안내소의 리아(Ria)가 말한다. 체코 출신의 그녀는 남편을 따라 이곳에 이주해 왔는데, 니수아(Niçois, 니스 사람) 못지않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니스는 오랜 시간 독자적 문화를 이어왔어요.프랑스의 다른 곳과는 언어, 건축, 음식 모두 다르죠.” 그녀의 설명이 사뭇 진지하다.
14~19세기까지 니스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영토 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던 곳이다. 1860 년 비로소 프랑스 본토의 땅이 됐지만, 구시가(Vieux Nice) 곳곳에서는 지금도 니스의 옛 언어와 프랑스어 표기를 병기하곤 한다. 19세기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을 만큼 예스러운 구시가는 현지인의 삶을 대변하는 장소다. 쿠르 살레야(Cours Saleya) 광장에는 월요 일을 제외하고 모든 날이 꽃향기로 가득 찬다. 18세기 후반부터 이어온 니스의 꽃시장 마르세 오 플뢰르 (marché aux fleurs)는 자국의 자존심을 드러내는 삶의 현장이다. 프로방스의 대표 꽃인 미모사를 비롯해 이름 모를 색색의 꽃중 80퍼센트는 현지에서 직접 재배한다. 매년 세계인이 몰리는 니스 카니발이 다가오면 꽃 시장은 더욱 분주하다. 10만 송이의 꽃을 주고 받는 퍼레이드에 쓰일 꽃을 조달하는 것도 이들의 몫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가판대의 도열을 통과하자, 미로찾기를 해도 좋을 만큼 구불구불한 골목이 이어 진다. 연중 최고의 카니발이 열리는 기간, 세계 각국의 여행자가 뒤섞여 걷고 있다. 정오가 되자 울리는 대포 소리에 여행자는 순간 깜짝 놀랄 것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밥 먹으라는 소리예요.” 리아가 대수롭지 않은 듯 레스토랑에 앉아 총성의 전설을 설명한다. 이는 19세기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니스의 전통 놀이 페탕크(pétanque, 쇠구슬 게임)에 빠져 매일 점심 시간을 어기던 남자는 결국 이혼을 통보받는다. 사태의 심각상을 깨달은 남자가 시청에 정오가 되면 시간을 알려달라는 청원을 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니스에서는 정오가 되면 우렁찬 총성이 울린다고. “아르 드 비브르(Art de Vivre)! 우리에겐 느긋하게 먹는 식사가 곧 삶의 예술입니다. 미식은 프랑스의 유산이자 행복이에요.” 리아가 음식을 입에 넣으며 말한다. 테이블에서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당연하듯 점점 크게 울려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