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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Thing in Nature
​세상 모든 것의 풍경

유럽의 작은 도시 슬로베니아는 바다와 산, 숲과 물, 땅속까지 파고든 자연 만물이 한데 어우러져 비현실적 풍광을 그려낸다.

태초의 자연은 이곳에서 세상 모든 아름다움에 관한 정의를

다시 내리려는 듯하다.

Published by Lonely Planet Magazin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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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잠든 도시, 지옥을 본뜬 동굴, 영원불멸한 사랑의 종이 울리는 호수. 슬로베니아의 신화는 끝나지 않는 동화처럼 이어진다. 국토 면적이 2만 제곱킬로미터 조금 넘고, 인구는 200만 명에 불과한 소국. 영문 철자에 박힌 러브(S‘LOVE’NIA)를 찾아 국가 전체를 사랑으로 엮고 낭만을 이야기하는 나라. 우리는 이제 막 동화책 첫 장을 펼친 아이처럼 창밖의 그림을 바쁘게 더듬는 중이다. 

“슬로베니아는 ‘유럽의 치킨’이라고 불립니다.”18년 경력의 베테랑 가이드 알레슈(Aleš)는 여행객을 향해 쉴 새 없이 자국의 이야기를 던진다. 국경선이 조각조각 맞붙은 유럽 지도 위에 슬로베니아는 뾰족한 벼슬과 통통한 두 다리가 있는 닭 형상을 띠고 있다. 사방으로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헝가리와 국경을 맞댄 이 작은 나라가 유럽 역사 속에서 자립과 존속을 위해 싸워왔을 시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수도 류블랴나(Ljubljana)에서 자동차로 약 2시간 거리의 항구도시 피란으로 가는 길, 차창 밖은 지루한 서막처럼 밋밋하다. 목가적 그림 속에 듬성듬성 세운 농가, 늘쩡늘쩡한 말이 주인공처럼 빛날 뿐이다.

Pinan
​가만한 시간

알프스산맥, 지중해, 파노니아 평원, 카르스트 지 대를 모두 아우르는 자연 지형은 슬로베니아가 내세 우는 큰 자랑거리다. 알레슈가 살짝 격양된 말투로 슬로베니아를 짧게 경유하는 여행자를 안타까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드리아해를 둘러싼 아름다운 마을 피란을 놓치는 아쉬움 같은 거다. 피란은 크로아티아,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세 도시에 걸친 이스트라반도의 최서단 지점. 슬로베니아의 해안선은 남서부로 뻗은 46.6킬로미터의 연안이 유일한데, 화려한 카지노와 역사 깊은 호텔, 국제공항이 들어선 고급 휴양지 포르토로지(Portorož)에 비하면 피란의 구시가는 구멍 가게에 비할 만큼 규모가 작다. 요트가 정박해 있는 항구 인근에 여행객을 쏟아낸 자동차 행렬이 떠나고, 타르티니에브 광장(Tartinijev Trg)까지 느긋한 걸음을 옮긴다. 해가 낮게 깔린 트리에스테(Trieste)만 주변을 빙 두른 15세기 고딕 양식 건축, 돛을 내린 요트, 유유히 낚시를 즐기는 현지인. 이런 풍광 속에서 여행자의 시간도 조금은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광장을 둘러싼 식당 야외 테라스에서 사람들은 여유를 만끽하며 느긋한 식사를 즐긴다. 손이 느린 셰프의 음식을 기다리는지, 오후의 볕을 부족함 없이 쬐려는 심산인 지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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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에는 오랜 세월 영향을 받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조지대성당 (Župnijska cerkev sv. Jurija)을 향하는 언덕길에 다닥다닥 붙은 4층 건물이 골목에 그늘을 드리운다. 타르티니에브 광장부터 자동차 진입은 일절 금한다. 시간이 멈춘 듯한 중세 도시를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서다. 예술적 영감을 주는 골목에서 어느 화가는 붓을 들고, 광장에서 뛰어 놀던 아이는 빨래가 축 늘어진 언덕 위 테라스 집을 찾아 들어간다. 그리고 여행객은 피란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 저 멀리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를 가늠하며 아드리안해를 지긋이 바라본다. 수 백 년 동안 시간은 지금처럼 가만히 흘렀으리라. 발밑으로 붉은 지붕이 얽혀 있고, 바다 위로 목적을 모르는 배 1척이 유유히 지나간다. 해가 저물면서 슬로베니아의 동화 같은 한 장면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Postoina 
지하의 파라다이스

류블랴나와 아드라아해 사이에는 카르스트 지형의 기원이 숨어 있다. 카르스트의 어원이 처음 시작된 슬로베니아 남서쪽 도시 포스토이나는 석회암 지형의 전형적 모습을 띤다. 인류가 지구에 발을 딛기 전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 자연이 빚어놓은 지하 세계는 오늘날 장대한 볼거리로 남아 있다.

슬로베니아에는 약 1만 개가 넘는 석회동굴이 있는데, 단 15개만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그중에서도 1년 내내 개방하는 곳은 단 3곳 뿐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길이 24km) 포스토이나 동굴(Postojnska Jama)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1년 내내 개방하는 곳 중 하나다. 이 동굴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기록한 문헌은 없지만, 가이드 마리오(Mario)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동굴 열차 기관사로 일하던 기억을 더듬으며 동굴의 역사를 짚어간다. “이곳 주민이 동굴을 발견하고, 1818년 일반인에게 개방했어요. 동굴 탐험을 위한 꼬마열차가 생긴 건 1872년 입 니다. 동굴 안에 전기 조명을 설치하고, 열차 궤도를 만드는 일부터 쉽지 않은 작업이었죠.” 오늘날 관광객에게 허용하는 구간은 단 5킬로미터. 동굴 열차를 타고 65미터 지하로 내려가면 도보로 돌아다닐 수 있는 약 3킬로미터의 길이 열린다. 약1시간 30분 동안 주어진 시간에 동굴 전체의 약 5분의1만 돌아볼 뿐이지만, 사실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른 아침부터 동굴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려야 하고, 지하의 차가운 공기를 견디기 위해 두툼한 점퍼도 필요하다. 무릎을 최대한 굽혀 아담한 열차에 오르면 뚝뚝 떨어지는 물을 맞거나, 낮은 천장을 지날 땐 고개를 연달아 숙여야 한다. 무엇보다 동굴 안에서 어릴 적 상상력을 총동원해야 할 지 모른다. 피사의 사탑, 도마 뱀, 화이트 초콜릿 무덤, 스파게티석 등. 제멋대로 뻗은 석회암은 인간의 호기심을 끝 없이 자극할 테니까. “처음 동굴을 발견한 주민들은 이곳을 괴물이 사는 집,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마리오는 일행이 종유석을 보고 내뱉는 추측성 얘기들을 잠시 끊으며 말한다. 당시 동굴에 처음 들어온 인간에게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드러난 울퉁불퉁한 석순과 석주, 종유석은 악마의 형상으로 다가왔으리라. 물론 인간을 위협한 건 괴기한 석회암뿐이 아닐 것이다. 압도적인 자연의 웅장함은 두려움과 공포로 인간의 한계를 실험하기에 충분하다. 지옥이라 여겼던 동굴에 ‘천국으로 향하는 다리’를 만들어놓은 건 인간이 차마 놓지 못한 희망 같은 것일까? 구름다리를 건너자마자 마리오는 다시 지옥체험을 알리듯 잠시 소등을 알린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어둠, 동굴 특유의 서늘한 공기만 이 주변을 맴도는 순간, 감탄사를 연신 내뱉던 모두 하나가 되어 숨을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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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투어의 종점은 종유석이 대리석 기둥과 샹들리에를 이룬 댄싱홀(dancing hall)이다. 1899년 이 곳에는 세계 최초 지하 우체국이 들어서기도 했다. 같은 자리에 지금은 기념품이 주렁주렁 걸려 있다. 콘서트홀이라 불리는 널찍한 돔에는 1만 명이 동시에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자연 음향 시스템이 작동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특별히 웅장한 오케스트라 공연을 마련한다고. “동굴은 위험한 곳입니다. 반드 시 전문 가이드가 동행해야 하죠. 좀 더 스릴있는 동굴 탐험을 원한다면, 전문 장비를 갖추고 5시간 정도는 돌아다녀야 해요.” 지상으로 올라가는 열차 앞에 서서 마리오가 손을 흔든다. 지하부터 지상까지, 10분이 채 안되는 거리임에도 전혀 다른 세계가 극명히 갈린다. 과연 어느 쪽이 진정한 파라다이스일까?

Julian Alps 
​만물이 숨쉬는 신의 땅

“유럽 대륙 한구석에 위치한 슬로베니아의 율리안 알 프스는 프랑스의 샤모니(Chamonix)나 스위스의 체 어마트(Zermatt)에 필적하는 놀라운 자연을 품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인파가 적어 훨씬 느긋하게 산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론리플래닛이 2018년 ‘최고의 지역’으로 율리안 알프스를 꼽으면서 써 내려간 문장에는 이곳의 매력을 응축하려는 흔적이 엿보인다. 슬로베니아가 품은 율리안 알프스는 서북 쪽으로 길게 뻗어 이탈리아 북동부까지 이른다. 슬로베니아 영토의 4퍼센트를 차지하는 산맥으로 해발 2,000미터 이상의 고봉, 깎아지른 절벽, 웅장한 폭포, ‘알프스의 눈’이라 불리는 에메랄드빛 호수를 아우른다. 슬로베니아인이라면 이곳을 오르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도 전해진다. 분명한 건 아직 이곳이 전 세계 모험가만 은밀하게 드나드는 비밀의 알프스라는 사실이다.

“지중해의 따뜻한 바람과 만년설이 공존하는 나라는 유럽에서 슬로베니아가 유일할 겁니다. 이토록 작은 영토에서 말이죠.” 가이드 알레슈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슬로베니아의 유일한 국립공원 트리글라브 국립공원(Triglav National Park)은 최고봉 트리글라브산(3개의 산봉우리로 가장 높은 봉우리가 2,864m)을 중심으로 거대한 산군을 이룬다. 덕분에 슬로베니아 어디에서든 한 여름에도 눈 덮인 산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가까이 다가서면 석회암의 하얀 절벽이 칼날처럼 날카롭다는 사실을 알 테지만.

국립공원을 둘러싼 천혜의 자연은 원시 그대로 보존돼 있다. 덕분에 이곳을 찾는 암벽등반가와 트레커는 2,000여 종이 넘는 야생 동식물을 구경하고, 스키점프, 캐녀닝같은 이색 스포츠도 즐긴다. 물론 절경을 감상하는 묘안도 있다. 케이블카를 타면 해발 1,535미터 높이의 보겔스키 센터까지 단숨에 오른다. 이곳에서부터 약 400미터 높은 보겔산(Mt. Vogel) 정상에 오르면 율리안 알프스의 압도적인 자태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율리안 알프스의 고봉 사이로 흐르는 보힌 호수(Lake Bohinj)는 신비한 생명체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묘한 색을 띤다. 초록잎이 빽빽한 숲과 하얀 암봉이 드러난 가파른 바위는 색채의 극명함을 강조하는 요소다. 청둥오리 떼에 둘러싸인 노인, 낡은 카누를 옆에 낀 소녀, 떼 지어 보트를 타고 보겔산 가까이 다가서는 여행객,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패들보트를 타는 청년까지. 호숫가의 풍경은 물살보다 더 잔잔하게 흐른다. 초기 슬라브인은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트리글라브산을 보고 하늘, 땅,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머리가 셋 달린 신의 집이라고 믿었다. 보힌은 ‘신이 숨겨놓은 땅’이라는 뜻으로 전해 내려오며 언제나 영험한 기운이 감돈다. 하늘을 향해 진위 여부 를 따질 수 없는 노릇이지만, 지금눈 앞에 펼쳐진 풍경 안에서라면 부정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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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ed
요정이 남긴 푸른 낙원

율리안 알프스는 맑고 투명한 2개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보힌과 블레드 호수. 율리안 알프스 산맥에 쌓인 눈이 녹아 생긴 2개의 빙하호는 슬로베니아를 대표하는 동화적 풍광이다. 규모로 보자면 보힌이 블레드보다 훨씬 앞서지만, 명성에선 블레드가 좀 더 우위를 점한다. 태양 빛에 따라 시시각각 오묘한 색을 띠는 블레드 호수를 둘러싼 외딴섬과 교회, 가파른 절벽 위에 우뚝선 고성은 그림 엽서의 빛나는 조연이다.

150여 년 전, 스위스 출신의 어느 의사는 블레드의 한적한 경치와 온천수의 치료 효능을 내세워 요양이 필요한 사람을 불러 모았다. 당시 요양원에는 아편중독, 천식 환자가 머물며 건강을 되찾았다고 전한다. 때마침 한적한 휴양을 원하던 부호들은 옥빛 호수가 그림처럼 걸린 방갈로와 대규모 별장을 짓기 시작했다. 훗날 구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또한 이곳을 개인 별장으로 낙점했다. 블레드는 왕족 휴양지의 명성을 지금도 유지한다. 호수 인근 5성급의 유서 깊은 호텔에선 1930년에 들인 가구와 묵직한 금속 키를 자랑스럽게 꺼내 보이고,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국빈의 방문을 자랑스레 늘어놓는다. 셰프의 만찬, 스파의 특효 같은 문구는 이곳 호텔마다 붙는 관용구 같은 거다.

호수를 매만지는 지중해의 따뜻한 바람과 저 멀리 흐릿한 알프스의 설경은 낯선 조화를 이룬다. 길이 2킬로미터, 폭 1.5킬로미터가 고작인 작은 호수에는 슬로베니아의 유일한 섬이 외롭게 떠 있다. 블레드섬까지 수시로 오가는 23척의 나룻배 플레트나 (Pletna)는 호수 위를 점점이 떠다니며 한 폭의 수채화를 완성한다. 99개의 계단 위에 자리한 성모 승천 교회(Cerkev Marijinega vnebovzetja)는 블레드의 상징 같은 건축물이다. 이곳에선 하루에도 수십 번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대부분의 염원은 사랑이다. 종소리 가 불러올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이나 성당에서 내려 다본 풍광은 영원을 약속할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이다. 누군가 교회 첨탑 끝에 매달린 밧줄을 힘껏 잡아 당겼는지 청아한 종소리가 밖으로 울려 퍼진다. 간절한 사랑의 염원이 호수의 잔잔한 물결을 타고 신에게 전해졌으리라.

블레드의 가장 높은 언덕에는 낮은 성벽의 고성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한때 구 유고슬라비아 왕족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던 블레드성에 오르면 경치가 좀 더 시원하게 펼쳐진다. 호수 위로 100미터 넘게 솟은 중세 요새 내부는 세월을 고스란히 묵혀두었다. 중세 기사가 입던 갑옷과 검 전시장, 3대째 내려오는 대장간, 중세 인쇄술을 복원하는 작업장 등 구석구석 이 시대를 복원한 모습이다. 블레드에서 발굴한 유물을 모아둔 전시장에서출발해 중세 복장을 한 나이 지긋한 소믈리에가 지키는 와이너리까지 둘러보다 보면, 성벽 밖 풍경은 뒷전으로 미룰 만큼 꽤 흥미진진하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이 유독 느긋해 보인다면, 자연을 옆에 끼고 살아서일 거예요.” 알레슈가 블레드 마을을 빠져나가며 말한다. 슬로베니아는 영토의 3분의1이 유럽 연합의 생태 보호 구역으로 묶여 있고, 2만 8,000킬로미터의 물길과 1,300개가 넘는 호수를 간직하고 있다. 동식물과 공생하는 자연을 각별히 보존하는 것은 현지인에게 당연한 삶의 이치다. 창밖은 이내 첫 장면처럼 평온하게 채워 질테고, 동화 같은 이야기가 없다면 믿기 힘든 자연이 이내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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